1인 가구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0-05-29 |
---|---|---|---|
첨부파일 | 1인_가구.jpg | 조회수 | 3,872 |
1인가구와 잘 아플 권리 <이 글은 계간 무위당사람들 70호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새롭게 결혼을 하는 신혼부부도 있고 예비부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남녀가 결혼을 꿈꾸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비혼’ 여성도, ‘비혼’ 남성도 흔한 시대입니다. 1인가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북유럽의 국가들 중에는 1인 가구 비율이 50%에 육박하는 나라들도 많습니다. 1인 가구에게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해 무위당학교가 마련한 강좌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 혼자 살다 아프면 어쩔래? 흔히 건강할 권리는 많이 아시죠? 저는 질병권,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잘 아플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이에요. ‘혼자 살다가 아프면 어쩔래?’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흔히 하죠. 신문에서는 ‘1인가구 고독사,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장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러 미디어에서 1인가구가 질병에 취약하다는 통계를 주기적으로 내보냅니다. 1인 가구들은 잦은 외식으로 나트륨 섭취량이 많고 때문에 고혈압 발병률이 높다는 식이죠. 이런 보도들을 보시면 어떠세요?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불만을 품어본 적은 없으신가요? 저는 굉장히 불만이었어요. 왜 저렇게 1인가구가 이 사회의 근원적인 취약계층인 것처럼 이야기할까. 우리는 인간의 몸이 굉장히 독립적이라고 여기잖아요. 저는 우리의 몸은 독립된 신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대에 들어서 여성의 몸은 말라야 아름답다고 사회가 말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도전하게 됐고 실제로 현대 여성들의 신체 사이즈를 변화시켰죠. 마른 몸을 사회가 추앙함으로 인해서. 만약 사회에서 뚱뚱한 몸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많은 여성들의 몸은 뚱뚱할 거예요. 나의 의지대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정한 미의 기준이 굉장히 마른 몸이기 때문인 거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몸과 의지가 사회와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질병이 개인화된 사회 제 친구 중에 근위축성 척수염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해 생활해요. 저희 둘이 같은 병원에 다니거든요. 저는 보통 하루에 아홉 알에서 열한 알 정도의 약을 먹고 살아요. 그 약을 먹어야 강의도 하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처방받는 종류가 열한 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보통 한 종류나 두 종류의 약을 처방받아요. 저희 둘 중에 누가 더 건강한 걸까요?
![]() 질병은 사회적 결과물 여러분 ‘펜로즈의 계단’ 아시나요? 계속 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 어디에도 오를 수 없는 계단이죠. 저는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지만 빈익부 부익부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잖아요. 건강은 사회적인 여러 조건들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개인이 좀 더 노력하면 건강해질 순 있겠죠.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변호사 되고 의사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게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점점 더 희귀해지는 거잖아요. 하루에 삼십분 땀나게 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하루에 열두 시간 혹은 그 이상 노동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도 퇴근 후에 헬스장 가서 운동하지 않고 온 것을 자책하죠. 저는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 자체가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다’ 이런 인식이 있잖아요.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1인 가구 얘기를 드디어 시작하겠습니다. 1인가구가 한국사회에 출현한지는 굉장히 오래됐죠. 그런데 최근 1인가구 비율이 아주 급하게 늘었습니다.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부양의무제’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부양의무제 폐지를 놓고 청와대 앞에 ‘부기우기(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위한 우리들의 기지개)’ 농성장이 있습니다. 부양의무제는 가족을 1차적인 복지단위로 보는 데서 나오는 거거든요. 특히 장애인 분들이나 홈리스 분들이 부양의무제 피해를 직접적으로 많이 봅니다. 중증장애인의 경우에는 가족이 있지만 돌보지 않고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수급권자 신청을 하러 갔더니, 서류상에 동생도 있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어서 수급권자가 아니래요. 근데 중증장애인은 노동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굶어죽거나 죽지 않을 만큼만 생존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겁니다. 홈리스 분들도 그런 분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장애인 운동, 홈리스 운동하시는 분들이 농성장을 만든 건데요. 세계적으로 그래왔지만 특히 한국은 가족을 1차적 복지담당자로 보고 있어요. 가족 안에서 1차 복지가 되고 그 이후에 사회가 복지를 감당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죠. 그래서 1인가구가 많아지니까 가족이 복지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그걸 정부가 부담하게 되니까 혼비백산하게 되는 거죠. 지금처럼 여덟 시간 노동하고 퇴근하고 쉬는 생활이 일반화될 수 있었던 건 현대자본주의 자체가 여성의 무상 노동을 전제로 발달했기 때문이에요. 여성들이 무상으로 제공한 노동 위에서 집이 휴식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1인가구가 대거 출연하면서 이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집에 무상으로 노동을 제공하던 존재들인 엄마나 아내가 없어진 거죠. 그래서 1인가구가 대거 출현하게 되면서 사회가 굉장히 진동했습니다. 누군가 무상으로 제공했던 것들을 사회가 해야 하니까 비용이 더 들겠죠. 지금은 1인 가구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좋아졌지만 불과 2~3년 전만 해도 1인 가구가 이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저와 같은 비혼주의자들은 더 공격을 많이 받았죠. 1인가구의 출현에 우리 사회는 굉장히 당황했고 지금도 당황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1인가구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를 썼어요. 1인가구가 대세가 된 지금은 사회로 포섭하고 같이 살 수 있게 하려는 쪽으로 인식이 변화했습니다. 그래서 지자체에서 앞 다퉈서 정책을 만들고 하는데요. 제가 앞서 계속 이야기했지만 1인가구라는 삶의 형태 자체가 소수자적 정체성이라거나 위험한 건 아니에요. 우리 사회가 어떤 제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서울시는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65세 이상의 분들, 혹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간호사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서비스가 있어요. 근데 저의 문제의식은 이런 서비스가 65세 이상 노인뿐만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들 혹은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제공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자체가 가진 자원으로 잘 할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에요. 입원할 정도는 아닌데, 집에서 혼자서 아프기에는 위험한 상황에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면 1인가구들이 혼자 살아도 덜 불안하겠죠. 제가 또 하나 제안하는 것은 단기요양공간입니다. 병원에 입원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보건소 안에 단기적으로 머물 수 있는 요양시설이 있는 거죠. 1인가구인 사람들이 그런 곳을 이용할 수 있겠죠. 거기서 밥도 제공받고 간단한 치료도 받고.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혼자 살아도 덜 불안할 수 있겠죠. 또 하나 제가 구상한 건, 돌봄두레입니다. ![]() 두레에 가입한 1인가구들이 요청하면 또 다른 1인가구가 와서 돌봐주는 거예요. 어떤 의료적 기술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정서적 도움을 나누는 거죠. 혹은 물리적 시간을 나누는 거죠.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1인가구로 살아도 덜 불안하겠죠. 사실 모든 사람은 질병 앞에 취약하고 질병이 두려워요. 고독사는 1인가구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몸의 특질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사회가 어떤 제도와 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몸이 장애인으로 구현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1인가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1인가구라는 특성 자체가 취약한 게 아니에요. 이 사회가 다인가구 중심으로 세팅되어있기 때문인 거죠. 그래서 문제는 몸이 아니라 제도다. 다시 강조하는 거고요. 제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개인을 계속 도움을 받아야하는 취약한 존재로 만드는 거죠. 제도의 뒷받침이 있으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어요. 제도의 빈곤이 1인가구의 취약성을 만드는 거지 1인가구 자체가 취약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1인가구에게 좋은 제도는 다인가구에게도 좋은 거예요. 지하철에 승강기 만드는 투쟁을 2000년도 초반에 중증장애인들이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들뿐만 아니라 유아차를 탄 부모와 계단이 불편한 노인들도 편해졌어요. 버스에 다음 역을 문자로 알려주는 전광판도 청각장애인을 위해 생긴 거지만 건청인들도 방송을 놓쳤을 때 그걸 보면서 확인할 수 있게 됐죠. 소수자에게 좋은 건 대체로 다수자에게도 좋아요. 1인가구가 늘어남으로서 사회적 돌봄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본격화 되었고, 사회적 돌봄이 늘어날수록 다인가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훨씬 좋은 사회가 됩니다. 우리는 잘 아플 수 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최종적인 이야기는 이겁니다. 우리는 잘 아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구든 다 아프잖아요. 덜 불안하게, 잘 아플 수 있는 사회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이 잘 구성되면 1인가구여도 불안하고 힘들지 않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일찍 비혼주의자로 정착하고 굉장히 오랫동안 1인가구로 살았습니다. ‘혼자 살다가 아프면 어쩔래’ 이런 이야기를 매일 들었어요. 그러다가 실제로 아프게 되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살았기 때문에 ‘질병권’을 생각해내고 ‘돌봄두레’도 생각하게 된 것 같거든요. 소수자적 위치에 있다는 건 그 삶이 힘들다는 증거긴 하지만 이 사회를 다른 결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되기도 해요. 장애인이기 때문에, 홈리스이기 때문에, 여성이라서, 퀴어라서 사회를 다르게 읽을 수 있죠. 저는 1인가구가 사회의 제도들을 다르게 읽고 사회가 어떤 곳으로 재편되고 변화되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라고 생각하거든요. 성별과 나이와 같은 자신의 자원에 따라서 필요한 제도가 다 다를 수 있거든요. 돌봄두레와 같이 꼭 거대한 자본이나 제도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1인가구라는 게 중앙 정부에서 보기엔 관리되지 않는, 가족제도를 전제로 한 복지제도를 뒤흔드는 파편화된 인간들이겠지만 사실 이 사회의 다양한 것들을 1인가구만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개척자로서의 관점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생의 어느 시기에 임시적으로 1인가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나 높아졌잖아요. 그래서 자부심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가 잘 아플 수 있기 위해서 어떤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어떤 가능성을 꿈꿀 수 있을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