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최시우 평창 패럴림픽 동메달리스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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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막내 선수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대회가 막을 내렸다. 감동의 경기를 펼치며 우리나라 패럴림픽 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한 아이스하키 대표팀. 동메달 결정전에서 승리한 후 얼음판 위에서 애국가를 불렀던 장면은 이번 패럴림픽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최 선수는 다치기 전에도 검도·이종격투기 등 꾸준히 운동을 해 왔다. 격투 종목 등 격렬한 운동을 좋아했던 최 선수에게 아이스하키는 ‘공을 넣기 위한 투기종목’처럼 느껴졌다. 딱 맞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시우 선수가 장애를 얻은 것은 치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2014년 여름. 병원의 대처 미흡으로 골절상이 패혈증으로 이어졌고 왼쪽 다리를 절단하게 됐다. 지체장애 2급이다. “예전엔 ‘천사들의 집’에 봉사활동을 가서 같이 뛰어놀곤 했어요. 다치고 나서 ‘이제 가서 축구하고 뛰놀지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라고요.”
최 선수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것은 부상으로부터 1년이 지난 2015년이었다.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게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장애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 반해 최 선수는 놀랄 정도로 빨리 사회에 복귀한 케이스다. “퇴원하고 어쨌든 학교에 가야 했어요. 친구들이 데리러 왔더라고요. 장애인종합복지관에는 아버지에게 ‘끌려’갔죠. 아버지가 워낙 개방적이고 좋은 분이라 가능했던 것 같아요.”
최 선수는 다치기 전에도 검도·이종격투기 등 꾸준히 운동을 해 왔다. 격투 종목 등 격렬한 운동을 좋아했던 최 선수에게 아이스하키는 ‘공을 넣기 위한 투기종목’처럼 느껴졌다. 딱 맞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선수로 뛰겠다고 하자 처음에 아버지가 많이 반대하셨어요. 장비 쓰는 운동은 위험할 수밖에 없잖아요. 떼쓰고 설득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그게 여기까지 올 줄은 저도 몰랐죠.” 그렇게 강원도청 실업팀에서 선수로 뛰게 됐다. 2016년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이 됐고, 2017년엔 태극마크를 달았다. 3년차인 올해에는 패럴림픽에까지 출전했다. 시기적으로 운도 따라줬지만, 최 선수가 워낙 재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 촬영도 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 선수는 휠체어가 아니라 의족을 한 상태다. 전적으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의족을 쓰기 시작했단다. 목표를 물었을 때 사뭇 진지하게 ‘연금 인생’이나 ‘건물주’라고 말했던 것 역시 여자친구와 빨리 결혼해서 ‘손에 물 안 묻히게, 밥 안 굶기게’ 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패럴림픽에 자원봉사자로 온 친구인데, 행사장에서 만나 반했어요. 평일엔 훈련을 하고 주말에 데이트를 해요.” 아이스하키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 눈이 빛난다. 국가대표가 아니라 영락없는 또래 청년이다.
우리나라 아아이스하키 대표팀은 현재 세계랭킹 3위다. 원래 6~7위권이었는데, 평창 패럴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가 차원의 지원도 많았고 선수들에게도 더 큰 동기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금메달이 목표였죠. 솔직히 내심으로는 은메달까지는 노렸어요. 이를 악물고 나갔죠. 그런데 미국도 캐나다도 이를 악물고 나왔더라고요. 캐나다전의 유효슈팅도 상대팀 선수가 그렇게 안 쫓아왔다면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첫 올림픽 데뷔골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경기에 임해 좋은 결과를 얻기까지는 숱한 노력의 시간이 있었다. 한창 훈련 받을 때 최 선수의 일상은 아주 단순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운동,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잔 후 웨이트 트레이닝과 빙상 훈련, 저녁 식사 후에도 운동. 정규 훈련을 마치면 개인 운동을 하기도 한다. 오후 8시에서 밤 10시 사이에 잠든다. 가장 힘든 것은 인터벌 트레이닝. 소위 ‘뺑뺑이’란다. “경기를 한 번 뛰면 많이 뛰어야 2분, 보통 30초~1분인데, 5분씩 ‘뺑뺑이’를 도니까 정말 토할 정도로 힘들죠.” 비장애 선수들과는 다르게 모든 움직임을 오로지 팔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안 힘들 수가 없다. “사실 체력적인 게 힘들다기 보다는, 아이스하키를 이해하는 게 어려웠어요. 그 동안 해왔던 종목과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전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어요. 10년 이상인 베테랑 선수 형님들도 계속 공부하고 계시고요.”
마인드컨트롤도 중요한 부분이다. 경기 중 닥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계속 생각해, 순발력과 상황대처능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멘탈 코치도 존재해 정신적인 케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앞선 올림픽 때 선수들의 인터뷰에 논란이 일기도 하면서 인터뷰 연습과 미디어 관련 교육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운동선수라면 가질 법한 징크스가 최 선수에게도 있다. “중요 시합 전 워밍업 때 부주장님한테 혼나면 경기가 잘 풀려요. 올해 초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했을 때 일본전에서 2골을 넣었던 날고 그랬고, 이번 캐나다전에서도 그랬어요. 이 징크스를 형님도 알고 계시니까,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셔도 잘 되라고 하시는구나 생각해 더 힘이 되죠.”
팀원들을 ‘형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언뜻 익숙하지 않다. 장애인 체육은 비장애인 체육계보다 비교적 위계질서가 약한 편이라고 한다. 어느 종목에서든 모두 형·동생이라 칭하며 좀 더 끈끈함이 있다. “형들이 워낙 잘해주세요. 컬링이나 양궁, 사격처럼 개인의 집중력이 필요한 종목은 약간 다른 편인 것 같은데, 아이스하키의 경우는 인원이 많이 필요하고 팀워크가 중요하니까요.” 40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뛸 정도로 워낙 선수생명이 길다는 것도 한 요인이다. 대표팀의 연장자는 49세. 23세인 최 선수와는 26년 차이다. “큰 형님이 저희 아버지와 두 살 차이예요. 따님이 고등학생이시고요. 그렇지만 형이라고 불러요. 이런 게 더 좋은 것 같아요.” 장애인 아이스하키 선수는 전국에 100여명. 후천적 장애는 언제 생길지 알 수 없고, 또 다친 후 5~6년이 지나야 비로소 나와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30대의 신인 선수가 부지기수다. 20대 초반 시작한 최 선수는 어떻게 보면 앞으로 20년 이상 활약할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장애를 얻은 것과 아이스하키를 한 것이 최 선수에게는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이에요. 첫 휠체어농구 시합 때에는 상대 선수와 싸움을 해서 코치님이 들어와 말리기도 했고요. 다치기 전에는 평소에는 괜찮아도 ‘뚜껑이 열리면’ 제어가 안 되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시간이 흘러 성숙해서인지, 다쳐서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인지, 운동을 시작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공적인 자리를 겪어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격이 많이 정제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낀다. “욱 하는 성격이 이제 경기 중에 발산되는 것 같아요.” 승부욕은 이제 경기에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는 자양분이 된다. 큰 경기에 강하고, 강팀에 강한 경향 역시 이런 성격 덕분이다.
누군가 다른 장애인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건네자, 최 선수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꿈과 희망은 잘 모르겠고, 할 수 있는 거니까 해야 되는 겁니다. 자신이 찾아서 뭔가를 해내야지, 소극적으로 머물러 있으면 안 돼요. 양지로 나와서 움직여야죠. 장애를 가진 게 운동을 하면서 불리했던 적은 없어요. 다친 곳이 다르고, 못 쓰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경쟁합니다. 무조건 운동을 해서 선수가 되라는 게 아니라, 뭘 해도 당당하게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저도 아버지가 없었으면 집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고 있었겠죠. 은둔생활이 편하긴 해요. 하지만 그건 비참하잖아요? 하던 걸 못 하게 되면, 다른 것을 찾아야지,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안 돼요. ‘내가 장애인이 되겠지’ 생각해본 사람은 없어요. 저도 그랬고요.”
이제 경력을 시작한 최 선수에게 미래는 넓게 펼쳐져 있다. “금메달 깨무는 세리머니는 베이징에서 해야죠. 지난 3년 동안 했던 것처럼 노력해야 되겠고요. 아직 주전 실력은 아닌데, 에이스 형님과 같은 조에서 뛰고 싶어요. 앞으로는 나갈 일만 남았죠.” 경기에서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지도자를 한 번 해 보고 싶기도 하다. 농담 삼아 훗날 이름을 딴 아이스하키 경기장이라도 건립하는 걸 목표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자, 최 선수는 손사래를 친다. “이제 대표팀 막내인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세계 최고의 막내 선수’ 정도가 지금으로선 목표 삼기 좋을 것 같단다.
사진 촬영도 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 선수는 휠체어가 아니라 의족을 한 상태다. 전적으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의족을 쓰기 시작했단다. 목표를 물었을 때 사뭇 진지하게 ‘연금 인생’이나 ‘건물주’라고 말했던 것 역시 여자친구와 빨리 결혼해서 ‘손에 물 안 묻히게, 밥 안 굶기게’ 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패럴림픽에 자원봉사자로 온 친구인데, 행사장에서 만나 반했어요. 평일엔 훈련을 하고 주말에 데이트를 해요.” 아이스하키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더 눈이 빛난다. 국가대표가 아니라 영락없는 또래 청년이다.​


글 이새보미야 사진 원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