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7시. 분주한 장양리 차고지
구름이 다 걷히지 않은 다소 흐릿한 날씨다. 간밤의 비가 여름을 모두 쓸어갔는지, 바람이 제법 선득했다. 아침 7시. 내겐 평소보다 한참 이른 기상이었지만, 장양리 차고지에서는 하루가 시작된 지 벌써 한참이나 지난 후다. 버스들은 앞이마에 제 번호와 행선지를 표시한 채 즐비하게 늘어서 달리기를 기다리고, 출발을 앞둔 버스 기사들은 준비를 마치고 운전석을 정돈하느라 분주하다.
차고지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는 승객도 제법 있다. 삼삼오오 출근하는 군인들이나, 머리를 채 말리지 못한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차례차례 버스에 올랐다. 찬찬히 살펴보니, 대부분의 버스가 운행시각표보다 몇 분 가량 빠르게 출발하고 있었다. 대중교통 커뮤니티 등에서 원주 시내버스는 이미 조발(早發)로 유명한 듯했다.
55번 중 무수막~관설동~사기막 노선 85㎞ 최장거리
장양리 차고지는 원주에 있는 차고지 두 곳 중 하나로, 시내외 곳곳으로 가는 거의 모든 버스를 만날 수 있다. 원주를 가로질러가는 다양한 노선이 운영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교외 지역으로 향하는 시외곽노선의 경우는 퍽 복잡하다. 번호는 같지만 도중에 여러 지선으로 갈라져 버스별로 종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버스 앞에 표시된 행선지를 잘 확인해야 한다. 오늘 탑승할 버스도 그랬다. 55번은 귀래 방면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지선에 따라 거돈사지·구만이·귀래·사기막·웃작실 등 종점이 각기 다르다. 도 경계를 넘어 충주 단암으로 넘어가는 차도 있다. 원주의 서남부 전체를 훑고 가다 보니 원주 시내버스 중 가장 긴 노선을 자랑하는데, 특히 55번 중에서도 흥업 무수막에서 출발해 관설초등학교까지 운행하는 ‘사기막(첫차)’ 차량의 운행 거리가 약85km로 제일 길다.
55번은 모두 관설동 종점에서 출발하지만 장양리발 귀래행 차량이 아침 7시 15분에 딱 한 대 있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총 거리는 63km 정도, 남북으로 가장 긴 노선을 한 번 타볼 심산이다.
오전 7시 15분. 장양리발 귀래행 출발
곧 55번 버스가 출발했다. 저상버스였다. 보통 장양리 차고지에서 타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기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잡았다. 첫 손님은 바로 세 정류장 뒤 영진아파트에서 탄 30대 남성으로, 가방이나 짐 없이 가벼운 차림이었다. 이윽고 우성아파트 앞에서 정장을 입은 장년 남성을 시작으로, 출근길에 오르는 것 같은 중·장년이 하나둘 탑승하기 시작했다. 서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우산철교를 지나 단계동 즈음에서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퍽 많이 탔다. 슬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창밖으로는 구름이 다소걷혀 해가 들기 시작했다.
버스는 광터와 보통리를 지나 문막으로 접어들었다. 자리가 꽉 차할머니를 위해 자리를 양보했다. 7시 55분경 문막중·고등학교 앞에 멈춰선 버스는 10분 정도 정차한 후 다시 출발했다. 아무래도 55번 노선은 원주에서 가장 예쁜 노선이기도 한 것 같다. 오른편에 아름다운 섬강이 드러나 탄성이 나왔다. 물굽이들, 스므리들, 마루들… 이름도 하나같이 예쁜 너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문막 평야는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넓단다. 길 이름은 견훤로. 이 노선엔 역사의 숨결도 잔뜩 담겨 있다. 안 그래도 문막 읍내에서 왕건이 올랐다는 건등산을 지나친 참이다. 굽이굽이 산길로 접어들고, 버스는 경동대학교 메디컬 캠퍼스와 옛노림초등학교를 지나쳤다. 노림리는 노나라 때 나무를 옮겨 심어 숲이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청동기 유적인 고인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온통 초록인 흥호리를 지나면 합수머리다. 제방이 돋워져 버스 내부에서 바로 보이진 않지만, 원주에서 흘러온 섬강과 충청도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에 서면 보는 이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고려 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뱃길로 세곡을 이송했던 흥원창이 있었다는 곳으로, 충청북도 충주, 경기도 여주와 함께 삼도가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전 8시25분. 부론면 소재지 도착
부론면 소재지에 도착한 것은 8시 25분 경. 모두가 빠짐없이 하차했다. 부론에 있는 원주금융회계고등학교 학생들과, 이 인근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이 버스의 주된 승객이었던 모양이다. 버스는 한 차례 더 10분을 정차했다. 기사님도 모처럼 내려 담배를 한 대태우셨다. 아침부터 장을 본 참인지, 농협 하나로마트의 비닐봉투를 든 아주머니 세 명과 할아버지 한 명이 타고,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부론면엔 법천사지와 거돈사지 유적도 있다. 귀래에서 관설동으로 향하는 55번의 복편(復便)은 모두 거돈사지를 들렀다 가니, 승용차가 없더라도 한번쯤 방문해볼 만하다.
제법 볼거리가 많은 노선이기도 하단 생각이 든다. 좀재를 지나며 아래로 남한강의 풍광이 펼쳐진다. 햇볕이 부서지는 강과 강변의 아늑한 논밭의 풍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워서, 이런 곳에 집을 짓고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건설업자가 고위공직자에 게성접대를 했다는 별장이 바로 이곳 정산리에 있었다고 했다. 시골길은 언제나 좋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길가의 수풀이 도로를 침범하고, 이따금 마을 앞을 지날 땐 오래된 수퍼마켓 앞의평상에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지나는 버스를 쳐다보는 모습이 정겹다.
오전 9시 정각. 종점인 귀래면소재지 도착
충주와의 경계인 황산천을 따라 동쪽으로 마을을 몇 개 더 지나고, 버스는 비로소 종점인 귀래면소재지에 도착했다. 9시 정각이다. 2시간 동안 길벗이 된 기사님께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젊은 아가씨가 종점에서 종점까지 올 이유가 없는데…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버스 운전만 30년을 했다는 베테랑 운전기사 전순학씨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20년간 고속버스를 몰다가, 정년 후에도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계약직으로 몇 년 더 일할 수 있는 시내버스로 자리를 옮기셨단다.
전순학 씨가 55번 버스만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주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은 매일 몇 개의 노선을 운행하도록 일별로근무 일정표가 짜여 있다. 오늘이 ‘문막 22’ 일정표에 따른 근무였다면, 내일은 ‘문막 23’ 일정표대로 버스를 운전하는 식이다. 전순학 씨는 문막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구성된 24개의 일정표를 순차적으로 매일 하나씩 소화한다. 노선을 다 외우기도 힘들 것만 같은데, 일정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오늘은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해,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차고지로 돌아간다. 출퇴근 시간까지 고려하면 17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는 것이다. 이틀 일하고 하루를 쉰다지만, 열악한 근무여건이다. 최근 연이어발생한 버스 졸음운전 사고들이 떠오르며,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순학 씨는 1989년 운전대를 잡으며 원주에 정착했다. 그때만 해도 ‘운전수’는 벌이가 괜찮고 좋은 직업이었다. 자가용이 많이보급되고 처우는 그다지 향상되지 않다 보니, 이제는 그다지 메리트가 없는 직업이 되어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도 젊어서부터 하던 일이니, 천직이라 여기고 계속 한다. 힘든 일만큼 보람 있는 일도 많지만 “그런 걸 다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나, 뭐.” 하고 웃는 게 전부다. 시외곽노선을 운전하는 일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이 많다. 겨울엔 제설이 잘 안 되어 시간에 맞추어 운행하기가 어렵고, 노인층이 많이 이용하기에안전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래도 원주에서 제일 예쁜 노선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다.
차부상회·종점다방의 정겨움
종점 모퉁이에 있는 ‘차부상회’에서 커피 한 잔을 사 마셨다. 버스정류소를 겸하고 있어, 가게 앞 평상에는 사람들이 앉아 버스를 기다리곤 하는 작은 가게다. 사실은 바로 옆에 있는 ‘종점다방’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이삿짐을 싸느라 여념이없다. 다방이 문을 닫는다니, 단골도 아닌데 무척 서운한 기분이든다. 55번 버스의 귀래발 출발 시각은 9시 35분. 전순학씨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화장실에 들르고, 담배를 한 대 태운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갈 예정이다. 55번 버스의 곁으로 양아치 고개를 넘어온 31번 버스가 들어오고, 충주에서 올라온 시외버스도 정차한다. 사람들이 분주히 버스에 오르고, 이윽고 버스는 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갈림길을 따라 다시 길을 떠난다. 문득 시구절이 하나 떠오른다. ‘우리는…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모두의 길에 행복이 가득하길 빌어 본다.
글.사진. 이새보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