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국지성 폭우가 밤부터 새벽까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어둠이 도시를 감싸자 비가 내렸다. 가느다랗게 시작한 빗줄기는 어두워지는 속도를 따라 굵어졌다. 무실동 중앙고속도로 옆 버려진 공터처럼 텅 빈 도로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대형 트럭들이 즐비한중간 정도 위치에 자리 잡은 작은 트럭 뒤쪽으로 작고 낡은 ‘OPEN’이란 네온사인 간판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독특한 가락의 네덜란드 라디오 방송이 빗소리와 함께 흘러 나왔다. 흠뻑 비를 맞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알맞게 매운 떡볶이와 빨간 오뎅을 ‘호호’ 불어가며 몸에 붙은 한기를 털어냈다. 아직개시도 못한 떡볶이를 기다리는 어른 손님은 빗속에 나무처럼 서서 기다렸다.
2015년 1월 길 위의 인생이 시작되다.
고일영(47)·김유희(40) 부부의 푸드트럭 풍경이다. 이 부부가 무실동의 한적한 도로에 작은 푸드트럭 자리를 잡은 것은 2015년 1월 초다. 영하 8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며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다. 6차선 도로 한 편에 자리를 잡고 매서운 바람을 받아 들이며 길 위에서 희망을 찾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주택가는 물론 상업지역도 아닌 곳이라 사람들이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주인을 찾지 못한 오뎅들은 맥없이 풀어져만 갔고 절반도 넘게 남는 날이 이어졌다. 떡볶이 양념도 말라붙기 일쑤였다. 이곳에서 푸드트럭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부부는 길 위의 인생을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시작된 길 위의 인생이 어느덧 3년차를 맞이하고 있다.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다. 민원 때문에 이리저리 도망 다니듯 쫓기는 일도 있지만 그것도 일정부분 해결되어 간다.
처음 1년 동안은 쉽지 않았다. 푸드트럭 자리가 사람의 이동이뜸한 지역이기 때문에 손님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을 고생하고 나니 2년차인 지난해부터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이 외진 곳에서 말이다. “뜸하게 찾아오던 손님들이 이제는 제법 많이 오고 있어요. 이 먼 곳까지 와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음식도 많이 팔아줘 너무 감사하죠. 가끔씩 푸드트럭에서 먹는 것이 편하다는 말도 해주고, 맛이 좋다, 가격도 저렴하다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세요.” 고씨는 푸드트럭을 찾아주는 사람들과 음식 조리를 위해 매일 새벽 약수를 손수 길어온다. 말통 3~4개씩은 꼭 챙겨놓아야 마음도 편하다.
분식이지만 최고의 맛을 추구한다
부부가 원주에 둥지를 튼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이것저것 사업도 해보고 직장도 다녔지만 얻은 것은 아픈 육신 이었다. 쉼이 필요했고 다시 일어서고자 생각했을 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바로 푸드트럭이었다. 평소에 음식 레시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고씨가 아내에게 제안했다. 아내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워낙에 많은 푸드트럭과의 경쟁도 경쟁이지만 장소가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집과도 가까웠고 아직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이만한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부부는 의기투합했다. 푸드트럭으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자고. “제가 요리에 관심이 있어서 레시피 연구도 많이 했어요. 푸드트럭을 하기로 마음 먹고서는 맛집에서 먹어보는 음식 하나에도 온 관심을 집중했지요. 심지어 식당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주방장에게 요리를 배웠죠. 집에서도 끊임없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비록 분식이지만 최고의 음식이 될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남편 고씨는 아직도 좋은 맛을 내기 위해 연구한다고 말한다. “처음엔 떡볶이와 오뎅의 양념 재료가 5~6가지 밖에 안 되었는데 지금은 양념이 꽤 많이 늘었어요. 그래도 본질적인 맛은 변하지 않도록 해요. 양념을 많이 넣어 깊은 맛은 더 있지만 그 맛은 크게 변하지 않는거죠. 그것이 다양한실험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가족처럼 즐겁게 먹자, 大家樂(대가락)
혹시 푸드트럭에도 이름이 있을까? 고씨는 빨간 오뎅이 탱글탱글 익어가는 철판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大家樂(대가락)에 대해 설명했다. “대가락은 잃어버린 대가족에 대한 의미와 더불어 대가족처럼 모여 즐겁게 음식을 먹자는 의미로 적어봤습니다. 대가락이 우리집 상호명은 아니지만 손님들이 대가락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기분이 좋더라구요. 아무리 작은 곳이라도 상호명은 있어야할 것 같아 인터넷에서 찾아 낸 ‘분식’이라는 일본어를 써 붙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분식회계’의 ‘분식’이더라고요. 한참을 웃었어요. 결국엔 대가락 아래 작은 글씨로 일본어 오뎅집을 의미하는 오뎅야(おでんや)를 적어놓았어요. 손님들은 오뎅집보다 대가락 글씨가 크다보니 거기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님 한 분 한 분이 더없이 반갑다고 말하는 고씨는 “겨울이 되면 장사가 더 잘될 것 같다고 많은 분들이 말하지만 길 위에서 생활하다보니 너무 추운 것이 가장 힘들다”며 “손, 발이 꽁꽁 얼어버리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 대가로 음식은 많이 팔린다고 귀띔해 준다.
최근에는 튀김 종류로 통닭을 선택했다. 양념도 직접 만든다. “튀김 한 종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처음에는 오징어튀김을 시작했는데 오징어값이 너무 비싸 포기했어요. 대신 생닭을 사다가 통닭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생닭은 매일매일 시세에 맞춰 구입하고 기름도 신선한 것만 사용하고 있어요. 양념도 따로 준비해서 처음 온 손님들이 시식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잘 되고 있습니다. 술을 찾는 분들도 더러 있지만 술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학생들이 많이 오고아가씨나 가족 단위로도 꽤 많이 찾기 때문이죠.” 마침 통닭 튀기는 소리와 빗소리가 어우러진 고소함이 입맛을자극한다.
“이곳 길 위에서 희망을 찾는다면 어떤 손님이 먹어도 맛있다고 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한번 해보려고요.”
하루 일과를 마치는 것이 그에게는 또 다른 일과의 시작이다.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길에서 희망을 일구고, 길에서 미래를 꿈꾼다. 길은 그에게 또 다른 삶이다. 그는 “길에서 음식을 만들다보니 무엇보다 청결 유지에 무척 애를 쓰고 있어요. 더욱이 아이들도 많이 이용하는 음식이라서 더욱 신경이 쓰이죠.”
여름 한 달 동안은 휴업이었다. 날이 너무 뜨거워 식재료 관리도 어려운데다 손님도 뜸하기 때문이다. 휴업 기간에도 그는 길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원주 지리도훤하게 익힌다. 꽁지머리를 한 그의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 단순히 유전적인 문제로 머리카락이 모두 없어지기 전에 한번 길러보고 싶다는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단정하게 벗어 넘긴 그의 꽁지머리가 네덜란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락 소리와 닮았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듯 보였다. 힘든 내색 없이 웃는 얼굴로 손님을 대하는 그와 그의 아내에게서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글. 원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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