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언저리에서 기웃기웃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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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20170927_174819.png | 조회수 | 9,602 |
제가 사는 곳, 그리고 자주 가는 곳을 보면서 현재와는 다른 변화를 만들 수 있고 그 변화된 모습이 지금보다 나은 삶이라는 만족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작년에 있었던 1, 2기 원주시 도시재생 아카데미는 비슷한 생각 혹은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미 ‘도시재생’을 실천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은 청년, 중년, 시니어 등 다양한 시민들도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자리였습니다. 미디어에서 보고 듣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구체적 지역성이 떨어지는 타 지역 사례를 보는 것과는 다른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즐거움만 있을까요? 도시재생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듣고 보게 될 때에는 안타까움이랄까 아쉬움도 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개인을 탓할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점은 도시재생 아카데미 이전에 있었던 퍼실리테이션 방법을 활용한 동별 모임에서도 드러났었는데 ‘성장, 발전, 더 나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간단하지만 간극은 꽤 멀기도 한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시재생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성장, 발전, 더 나은 삶’이 무엇인가 하는 논의를 충분히 한 후에야 요즈음 말하는 ‘도시재생’에 적합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보지만 그 논의는 잠시 접고 이미 도시재생이라는 말을 등에 업고 구체적인 사업이 실천되고 있는 때에는 현재의 어려움은 어떤 것들이고 해결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공부도 좋지만 공부로 끝나는 아카데미는 한계가 있다.’, ‘도시 재생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보수를 주기가 참 어렵다.’, ‘기성세대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20대 30대들은 또 그들 나름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어서 미래를 확실하게 보여 주기 어려운 일에 참여하기를 바라기도 쉽지 않다.’는 의견들은 도시재생을 실천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으로 듣곤 하는 것들 중 극히 일부일 텐데, 그러한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아마도, 아시는 분들은 익히 알고 계실 텐데 ‘도시재생 지원센터’ 같은 민과 관 사이의 중간 조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학문적으로 습득한 지식과 연구 역량과 실천력을 가진 전문가와 지방 정부의 생리와 일머리를 아는 공무원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정말 살기 좋은 곳,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원주’를 만드는데 한몫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갖춘다면 그동안 2기에 걸친 도시재생 아카데미와 후속적으로 이루어진 역량강화 아카데미와 협동조합들의 교육, 인문도시 사업 등등을 통해 양성되고 각성된 시민들이 활동할 좋은 기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청년’ 혹은 ‘후속세대’, 과거와는 달라야 할 기성세대 현재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 외에 새로움으로 도시와 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사람들을 생각하면 전통적으로는 신예(新銳)라고도 불리던 ‘청년(靑年)’들일 겁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최근 20대 30대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찬찬히 따져보면 과거에 힘주어 말하던 ‘청년’이라는 말은 그 ‘말 값’을 잃은것 같습니다. 지난해 원주에 강연차 온 분(충남 홍동마을 청년농부, 서울 공동체은행(共動體恩行) 빈고 활동가)들의 생각에는 이런 고민도 있었습니다. ‘청년’이라 부르면서 우리 모두의 문제인 학자금(학생 입장에서 또 부모입장에서), 주택, 일자리(생계), 행복한 삶 등등의 이슈를 타자화, 차별화, 개별화하는 것이타당한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처럼 ‘조국의 미래, 청년의 힘’이라거나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하는 구호가 보는이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데 별 효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게다가 ‘멘토’라고들 말은 하지만 삶의 지향점을 의미 있게 제시해 주던 ‘사표(師表)’의 권위에는 못 미쳐 보이고 ‘롤 모델’이라고는 하나 경쟁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멘토’와 ‘롤모델’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홍동에 살며 공부도 하고 농사도 짓는 청년 농부’와 서울에 살면서 ‘돈 없이도 즐겁고 재미있게 잘 살고자 공동체은행’하는 이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예리하게 현실을 타개하려는 ‘신예(新銳)’들인 것 같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면 그러한 신예들은 아마도 더많을 것입니다. 누구나 홍동 농부, 공동체은행 빈고 조합원들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직장에 조기 취업하거나 대학을 다니고 취업하여 청년세대를 지나 기성세대가 되고 미혼자에서 기혼자가 되고 학생에서 직업인이 되어 은퇴를 맞는 기성적인(루틴 라이프) 삶의 방식만이 일상적인 것이 아닌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새로운신예들’이 살아가는 법도 새로 배우고 함께 하는 법도 익혀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고령화 사회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제 40대중반을 넘기는 시민들에겐 더욱 발 빠른 변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고 그 또한 경험과 다양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도시재생’을 보는 입장? 어릴 때 놀던 추억이 솟아나는 곳들이 조금 과장해서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무색하게 변한 걸 보면서 과연 이걸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이익이 편중돼 있을 거라고 촉을 ‘냉정 모드’로 바꿔야 할지 가끔 골똘해지기도 합니다. 이미 이사간 지 오래지만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나 보기 좋지 않은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어찌 된 일일까 더욱 의아합니다. 성장과 분배도 해묵은 만큼, 자유와 평등은 더 해묵은 만큼 해묵은 얘기를 꺼내 볼까 합니다. 21세기에도 나이 40이 불혹(不惑)일까 의문이라는 분들도 계실만큼 변화가 많은 시대이지만 ‘부윤옥 덕윤신(富潤屋 德潤身)’을 말한 대학(大學)의 깨달음은 인공지능과 딥 러닝이 회자되는 시절에도 깊이 곱씹어 볼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을 위한 도시재생일까요? 그리고 삶일까요?’ 수입을 더 늘리고 집 평수를 더 늘리고 ‘나’의 사회적 권위를 더 늘리는 일에치중하는 것일까요? 살 집은 누추하지 않고 윤택할 정도면 좋겠으니(富潤屋 德潤身) 그 안에 깃들여 사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가꾸는 데 더 치중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후자에 동조한다면 우리의 삶도 좀 더 여유롭겠고 무분별하기 쉬운 도시 개발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도시재생’을 하는 길에 더 가깝게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으로 사는 데 치중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면 ‘도시재생’을고민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싶은 제게 어르신의 말과 ‘새로운 신예’들의 말들이 찾아옵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적당히 벌어서 아주 잘 살자!”, “모두가 주인 되어함께 즐겁게 잘 살자!” 글. 이강록 원주도시재생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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