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나눔이란 평등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다.” - 곽병은 밝음의원 원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8-29
첨부파일 곽병은24-1.jpg 조회수 9,214


원주의 슈바이처, 갈 곳 없는 이들의 벗, 인권운동가, 봉사자, 동네의사 등 수많은 이름을 가진 의사. 아내와 함께 병원을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빈자(貧者)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준 이. 곽병은(63) 전 갈거리사랑촌 원장이면서 현재 밝음의원 원장이다. 그를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고 들뜬 기분이다. 그의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으면 온 세상이 평화로워 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원주시 중앙로 차 없는 거리 밝음신협 건물 3층에 그의 작은 진료실이 있다. 작지만 온 우주의 섭리가 그곳에 있는 것만 같다.


진료 시간이었지만 환자가 뜸한 시간을 골라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 4.95(1.5)나 될까 말까 한 그의 진료실에서는 나눔의 향기가 물씬 배어 나왔다. 동네의사란 말을 유난히 좋아하는 그는 봉사를 하면 할수록 행복하다며 진정한 나눔과 봉사는 바로 평등사상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동일시할 때 비로소 나눔의 정신이 빛을 발한다는 것. 그와 함께 나눔과 봉사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원주에서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다

1984년 원주의 국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며 원주와 인연을 갖게 된 그에게 봉사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군의관 시절 원주시 단계동 사랑의 집을 매주 토요일마다 무료진료 봉사를 나갔고, 처음 취직한 곳도 영리병원이 아닌 수녀원에서 비영리로 운영하던 가톨릭병원이었다. 가톨릭병원을 나와 원주에 부부의원을 개원한 뒤에도 그의 봉사는 그치지 않았다.


원주의 윤락가에 진료실을 차리고 몸이 아픈 여인들을 진료했다
. 매주 수요일 오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간호사와 함께 진료를 봤다. 1년 동안 지속되던 진료실은 아가씨들이 줄어들면서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도록 권유했다.

원주교도소 의무과장으로 근무한 뒤에는 대한민국 제1호 인권상도 받았다. 당시 수용자들이 밥상도 없이 방바닥에 신문을 깔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퇴직금으로 받은 돈을 들여 180개의 밥상을 각 방마다 들여놓았다. 또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교정 십시일반이라는 제도(?)도 만들었다. 불우 수용자들에게 필요한 최소 생활비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10년이 지나도록 영치금이 한 푼도 들어오지 않는 불우 수용자들을 보고 가슴이 아파 시작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아무리 밥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해도 5,000원에서 1만 원의 최소 생활비는 필요했던 것이다.



도심 속 고독한 섬 윤락가에 스며들다

그에게 나눔은 삶 그 자체였다. 수련의 중에 경기도에 있는 나병환자촌인 성 나자로 마을로 토요일마다 무료진료 봉사를 다녔다. 원주에서 군의관으로 있으면서는 단계동 사랑의 집에 매주 토요일 3년을 다녔다. 부부의원을 개원하고 나서는 병원이 곧 봉사 활동의 장소였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 대신 봉사 활동 장소로 윤락가를 택했다.

“1989년 개업을 하고 나서 속칭 40계단이라고 하는 원주의 윤락가에 진료소를 차렸어요. 포주방이 1호부터 있었는데 19호를 빌려서 매주 수요일마다 오후 8시부터 밤 10시까지 간호사과 함께 가서 진료를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니까 윤락가 여성들이 많이 줄어들었죠. 그 뒤부터는 병원으로 아픈 사람들을 오라고 해서 진료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윤락가는 도시의 고독한 섬입니다. 도시에 있지만 아무도 안 와보는 아주 소외된 지역이지요. 윤락가가 학성동이라는 도심에 있지만 하나의 외로운 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가 도와주려고 오지도 않고, 오면 그 분들이 거절하고 말입니다.”


나눔의 또 다른 말은 평등

그에게 나눔이란 바로 평등의 다른 말이다. 봉사활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밑바탕에 평등사상이 없다면 모두 헛것에 불과할 뿐이다. 가난하다고 무시하지 않고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나눔의 시작인 것이다.

나눔이라는 것이 후원해주고 봉사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밑바탕에 평등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너와 나는 같은 인격체다라는 마음이 없으면 봉사를 못해요. 봉사를 한다고 해도 몸만 가서 봉사하는 헛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 봉사를 받는 사람도 진정성을 못 느끼기 마련이지요.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그에게 나눔이란 가진 것이 많건 적건 간에 가진 대로 조금씩 나누는 것이다. 재산이 없으면 재능을 나눌 수 있고 재능마저 없다면 마음을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나눔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마도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위로가 되고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나누고 물질적인 것을 나누기보다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주는 것. 따뜻한 말 한마디나 따스한 눈길, 고운 웃음을 보내는 것이 곧 남을 배려하는 것이고 나눔이라고 봅니다.”


원주에서 만난 정신적 스승과 자연

그는 도심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자연과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정신적 스승이 많은 원주에 반했다. 부부의원을 개원하면서는 원주천 걷기를 좋아했다. 최근에는 원주천을 거닐며 찍은 사진을 책으로 발간하기까지 했다. 도심을 감싸고 있는 어머니 같은 산, 치악산이 있어 더욱 좋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에서 자란 그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서울 직장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근무 시간 자연과의 조우다.

원주에 사는 즐거움이라고 하면 으뜸이 바로 도심 가까이에 자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5분만 걸어가면 원주천과 같은 자연이 있고, 봉산뫼도 있고 원주천을 걸으며 바라보는 치악산, 특히 눈 덮인 치악산은 더 멋있고 일품이지요.”



정신적인 스승님이 여러분 계신 것도 그에게는 원주에 살아가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

그는 무위당 장일순(1928~1994) 선생님,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 선생님, 동양철학의 태두 중천 김충열(1931~ 2008) 선생님이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경우 처음에는 모르고 있었어요. 지인의 소개로 책을 보니까 너무 존경스럽더라구요. 살아가는 데 항상 생각하고 있던 지표(指標), 사표(師表)로 삼고 싶어하는 분이 딱 여기 계시더라구요. , 너무 반갑더라구요. 무위당 선생님 책을 진찰실에서 보다가 너무 맘에 들어 곧바로 선생님 생가로 달려갈 정도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기웃거리고 그랬지요. 또 원주에는 토지 박경리 선생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나라에 큰 어르신들이죠. 문학계나 철학계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중천 김충열 교수님도 우리나라 큰 어른이시죠. 무위당 선생님이나 박경리 선생님을 가까이서 자세하게 뵌 적은 없었지만 김충열 교수님은 가깝게 모셨어요. 같은 지역에 살면서, 그것도 한 시대에 근·현대사의 아주 큰 어르신들과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랑이고 좋은 점인 지 모르겠어요.”

경기도 이천이 고향이고 서울에서 대부분 자란 그에게 원주는 또 다른 고향으로 다가왔다.

원주사람들은 참 착하고 잘 감싸주고 받아주는 것 같아요. 그런 것도 좋은 점 중의 하나이지요. 또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흥법사지 등 거대한 절터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특히 거돈사지를 보고는 그 큰 모습에 정말 놀랐습니다. 강원감영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이 원주의 큰 자산이고 자랑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갈거리사랑촌을 시작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은퇴 뒤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싶어 주말이면 땅을 보러 원주 인근을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대안 3리 갈거리 마을을 소개받아 술미공소 신자였던 분에게 땅을 사 두었다. 양지바른 산속 아늑한 동네였다. 주변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 복지시설을 하는 데 주민 반대가 없을 것 같았고, 빈집 세 채에 밭도 있어 당시 5,300만 원에 구입했다.

그리고 1년 뒤 원주교도소에 의무과장으로 가게 되면서 대안리 땅에 갈거리사랑촌을 설립해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병원을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돈은 없었고 의무과장 봉급을 몽땅 갈거리사랑촌 운영비로 썼다. 9년여를 원주교도소 의무과장으로 일하면서 한 푼도 봉급에 손을 대지 않았다. 오직 갈거리사랑촌에 사용했다.

은퇴하고 난 뒤에 여유가 있고 건물이 있는 것보다 좀 허름하더라도 갈 곳 없는 분들이 의식주 해결하고 마음 편하게 주인의식을 갖게 했으면 좋겠다란 생각에 시작을 일찍하게 됐어요.

꼭 크고 새 건물에서만 일을 해야 하고, 크고 많은 일을 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작고 낡은 곳에서 작은 일이라도 내용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더 빛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한 마디로 겉보다 속이 중요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입니다. 운영비는 교도소에서 나오는 봉급으로 충당했지요. 봉급은 한 푼도 안 쓰고 모두 갈거리사랑촌 운영비로만 썼습니다. 그렇게 갈거리사랑촌이 운영되었죠.”

원주교도소 의무과장으로 있으면서는 진료원칙이 있었다. 부부의원에서 진찰하는 환자와 교도소에서 진찰하는 수용자를 똑같이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서 진찰하는 것이었다. 죄를 묻지 않고 오로지 환자로서만 대하자는 원칙이었다.

원주교도소 의무과장으로 있을 때 진료원칙이 부부의원에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나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이나 똑같이 진료하는 것이었어요. 교도소에는 강도범, 강간범, 조직폭력배 등 전국의 중범죄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무시한다든지 죄를 묻는다든지 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평등하게 진료를 봤습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06년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제1회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전국 처음으로
원주교정 십시일반회를 만들다.

원주교도소 수용자들끼리 서로 싸우고 다쳐서 진료를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인 즉 함께 방을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반찬이나 간식을 서로 사주지 않는 일 등 돈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교도소 내 수용자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 없거나 가족이 없는 수용자들은 몇 년이 지나도 영치금 한 푼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뜻이 맞는 몇몇 직원들과 상의해 월급에서 1만 원씩 불우수용자들을 후원해 영치금으로 한 달에 1만 원씩 넣어주는 후원회를 만들었다. 바로 원주교정 십시일반회였다.

수용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품은 지급되지만 이들에게도 최저 생활비가 필요합니다. 밥도 주고 옷도 주지만 생활용품인 치약이나 비누 등이 부족하면 사서 써야하는 데 그 비용이 최소 5,000원에서 1만 원 정도가 들어갑니다. 때로는 수용자들도 통닭이며 김도 사먹고 고추장도 사먹어야 하는 데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못 내기 때문에 몸으로 때우는 경우가 있죠. 빨래나 청소를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싸움이 나고 다치고 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최소생활비가 없는 사람들은 고아들이 특히 많아요. 영치금을 넣어주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죠. 10년이 넘어도 영치금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경우도 봤습니다. 그래서 원주교정 십시일반회를 만들었는데 참 잘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최극빈층을 위한 새로운 시작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

그는 2015107일 원주시 대안로 술미공소에서 퇴임미사를 봉헌하고 24년간 혼신을 기울인 원주가톨릭 사회복지회 갈거리사랑촌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갈거리사랑촌을 떠난 것은 아니다. 갈거리협동조합을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해 그동안 갈거리협동조합에서 해오던 일과 함께 가계재무 상담을 비롯 각종 교육을 진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2017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창업팀에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이 선정됐습니다. 노숙인 등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극빈층을 위한 금융기관 역할을 하는 사업입니다. 갈거리사랑촌 원장직을 물러나면서 이걸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극빈층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업은 했었습니다. 주로 방값 보증금이나 의치비, 치료비, 난방비, 긴급생활비 그런 것들이었어요. 그런데 돈을 빌려주면서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 상담도 해줘야 합니다. 그들은 돈을 빌려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걸 설명해주는 겁니다. 가계재무 상담, 교육도 하고 말입니다. 이 사업이 주 사업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은행을 이용할 수 없는 극빈층을 대상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를 교육시키고 상담해주는 역할인 셈이죠.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자체로부터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데 생활비는 주지만 사후관리가 없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 중 자활에 성공해서 이제 더는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든 일을 안 해서 그 돈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병이라는 겁니다. 국가가 주는 복지에 안주하는 것. 그래서 일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돈이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교육과 상담을 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방법은 지자체로부터 위탁을 받을 수도 있고 바우처 형태로 갈수도 있는 데 지자체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갈 생각입니다.”


지난해
8월 열린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을 위한 포럼의 주제가 바로 인간 존엄성과 생활자립이 보장되는, 복지와 협동조합이 융합한 지역사회를 향해였다. 20049월 창립해 노숙인들의 벗으로 활동해 온 원주 갈거리협동조합이 노숙인들의 자립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금융지원 사업과 더불어 종합적인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을 위해서였다.

지역에서 소외받고 방황하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에게서 고아와 과부, 떠돌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아꼈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곽병은 원장은 수 없이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원주시민대상, 2006년 대한민국인권상, 2012년 제7회 동곡상, 2013년 아산상 등을 수상했다.


글.사진. 원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