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치악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역사와 문화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7-24
첨부파일 운곡_원천석.jpg 조회수 2,564

불사이군(不事二君), 절개를 지킨 삶
원주 운곡 원천석 묘역
(原州耘谷元天錫墓域·강원도 기념물 제75호)
 



운곡 원천석(1330∼?) 선생의 묘이다. 원천석 선생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밝아 목은 이색 등과 함께 성리학의 보급에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태종의 어릴 적 스승이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조선왕조가 들어서 선생에게 벼슬이 주어지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묘역 내에는 봉분 앞에 묘비와 제사음식을 차려 놓을 수 있는 상석(床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있는 소박한 형태이다.
원주 행구동 석경촌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 절의정신의 상징으로 불리는 운곡 원천석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 시비, 사당 창의사(彰義祀)가 자리 잡고 있다. 운곡 선생의 묘갈(墓碣)에는 다음과 같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글이 새겨져 있다.​

군자는 숨어 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숨었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다.

운곡 선생은 고려 말 조선 초 격변기를 살다간 인물이다. 고려 말 중앙 관직에 올랐던 신진사대부 출신이기도 했다.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개창하자 벼슬과 세상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은 어린 시절 운곡을 스승으로 삼았던 적이 있는데, 그 인연으로 왕위에 오른 후 그를 중용하고자 했다. 태종은 예를 갖춰 운곡을 자주 찾았지만 응하지 않고 치악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계속했다. 여러 차례 태종이 운곡을 불러도 부름에 응하지 않자 몸소 옛 스승을 찾아 치악산까지 내려 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운곡 선생은 정용별장(精勇別將) 원열(元悅)의 손자이고,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中始祖)이다. 
원천석의 가문은 본래 지방 이족(吏族)이었는데, 부친 윤적 때 서울로 진출해서 정3품직인 종부시령을 역임했고, 이때 원천석도 개경에서 태어났다. 외가와 처가가 모두 원주원씨였으나 가계가 달랐다. 어렸을 때는 춘천 향교에서 글을 읽었고, 주변에서 “재명(才名)이 있고 문장이 여유 있으며 학문이 해박하다”는 평을 들었다. 27살이 되던 1365년(공민왕 5)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가 되었다. 
조선이 시작될 때 고려 왕조에 끝까지 충성하고자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72인이 있었는데, 운곡 선생도 그 중 한 명이다.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럽던 고려 말 현실에서 멀리 벗어나 은일로 일관된 삶을 하고자 했던 그의 은일 사상은 회고가(懷古歌)에서 그 뜻을 읽을 수 있다.

흥망(興亡)이 유수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치악산 황장금표 (왕의 나무가 있는 숲)
좌의정 민진원이 아뢰기를 “명년에 나라의 연제를 지낸 뒤에는 마땅히 태묘에 부제하는 예를 행하여야 하는데, 태묘가 협착하여 다시 봉안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3간을 더 지어야 하는데 기둥과 대들보의 재목을 더욱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양남의 섬 중외에 재궁으로 쓸 황장목을 가져와 써야겠습니다” 하였다. ; 左議政閔鎭遠奏曰 明年國練後 當行祔太廟禮 而太廟狹窄更無奉安之所 當更添造三間 而棟樑之材 尤爲難得 當取用於兩南島中外梓宮黃腸木矣[영조실록 권제7, 33장 뒤쪽, 영조 원년 8월 22일(정해)]

황장목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왕의 나무라고 일컬어지는 황장목은 조선시대 왕이 죽으면 관(棺)을 짜는데 사용됐다. 연륜(年輪)이 오래 된 소나무로 목질(木質)이 양호해 임금의 관인 재궁(梓宮)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다. 이토록 귀한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에서 보호했고 경차관이란 관리도 파견해 특별 관리했다. 
조선시대 전국 60곳의 황장목 소나무 숲이 봉산(封山)으로 지정돼 국가의 보호 관리를 받았다. 이 같은 황장목으로 이뤄진 숲이 원주에서 새로운 힐링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황장목 숲으로 가기 전 입구에는 일반인의 무단벌목을 금지한다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있다. 1979년 5월 30일 강원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됐으며 구룡사(九龍寺)가 소유하고 있다.​



태종대
태종대는 조선 태종이 스승인 운곡 원천석 선생을 기다렸다는데서 유래한다. 태종이 운곡을 만나기 위해 치악산으로 갔지만 이를 미리 안 운곡이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버렸다. 태종은 운곡이 살던 집에서 7일 동안 머무르며 올 때를 기다렸으나 스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 태종이 머물렀던
곳이 치악산 주필대(駐蹕臺)이며, 후에 태종대(太宗臺)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종은 운곡의 소식이 없자 집을 지키고 있던 노파에게 음식을 내리고, 아들에게는 기천현감을 제수했다. 태종이 한양으로 돌아가며 스승을 향해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는 산이 향배산(向拜山), 수레를 타고 넘은 곳이 수레너미 고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운곡은 태종의 부름을 끝까지 거절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진본 청구영언>

눈을 흠뻑 맞고 휘어진 대나무를 누가 굽었다고 하는가?
쉽게 굽을 대나무의 절개라면 눈 속에 푸를 소냐,
아무리 생각해도 눈 속에 변하지 않는 절개를 가진 것은 저 푸른 대나무뿐인가 한다.



수레너미와 해월 최시형
치악산 수레너미로 숨어든 해월 (최시형 1827~1898)
동학농민혁명 이후 손병희는 해월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은신시키기 위해 강원도 일대의 도인들과 함께 여러 곳을 살피고 다녔다. 이렇게 해서 숨어든 곳이 치악산 수레너미였다. 수레너미 마을은 치악산 줄기인 천지산과 매화산 사이 골짜기에 있다. 수레너미라는 이름은 조선을 건국한 태종이 자신의 스승 원천석을 모시려고 수레를 타고 이곳의 재를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월은 1895년 12월 눈이 쌓인 수레너미의 은신처로 숨어 들었는데, 이곳을 소개한 이는 여주도인 임학선(林學善)이었다. 임학선의 소개로 수레너미를 둘러본 손병희는 초가 하나를 구입해 해월을 모셨다. 동학혁명의 여파로 해월은 1895년 한 해를 인제와 홍천, 원주 등 강원도의 깊은 산중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하게 교단을 수습하고 있었다. 당시 수레너미 마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정감록 신봉자들이 30여 호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100여 채의 집이 있을 정도로 북적댔다.



해월이 수레너미에서 은거하자 제자들도 이곳으로 들어왔다. 당시 연로한 해월을 보호하기 위해 제자들이 늘 가까이에 있었다. 수레너미로 들어온 제자는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손병흠, 임학선 등이었다. 이들은 동학혁명의 피난길을 함께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긴 사이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족보다도 더 끈끈해졌다. 해월은 수레너미에 들어와서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백일기도에 들어가기 위해 임학선에게 식량을 준비시켰다. 당시 해월은 가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손병희의 부인 홍씨가 이들의 식사를 만들었다.​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 스토리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