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술이 있는 게스트하우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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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있는 게스트하우스

몇 년 전 태장1동주민센터 근처를 지나다, 근처에 ‘주담(酒談)’이라는 손글씨 간판이 붙은 곳을 발견 한 적이 있다. 협동조합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그 후로 종종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목재로 둘러싸 인 그 집에 궁금증이 일곤 했다. 술을 직접 빚어 파 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꼭 한 번 가봐야겠다 했지만, 어느 날엔가 보니 ‘시즌1을 마치고 곧 돌아 오겠다’는 플래카드가 내붙어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간이 흐른 후, 주담이 다시 문 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스트하우스이고, 전 통술을 체험해볼 수도 있단다. 무릎을 딱 쳤다. 술 과 여행, 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조합인가. 술을 즐 겨하진 않지만 여행을 갈 때면 얘기가 달랐다. 그 지역의 술을 맛보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행복한 점 일 것이다. 뒤늦게 검색해 본 에어비앤비1)에는 주 담 게스트하우스의 정보와, 이곳에 다녀간 수십 명 의 게스트가 남긴 후기가 별 다섯 개를 영롱히 빛내 고 있었다.
밤 10시 즈음 느지막이 도착한 주담 게스트하우스 는 고요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1층의 문을 두드 렸다. 호스트, 권혁주 씨가 나와 안내를 해 주었다. 두 채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구조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 오른쪽이 게스트들이 머무는 공간이 다. 왼편에는 작은 옥상이 있고, 뒤쪽 발코니에는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 본 건물 뒤편 마당엔 자그마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 어서, 공연이나 파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추운 날 씨였지만, 맑고 따뜻한 날의 유쾌한 저녁 그림이 그 려지는 것 같았다. 게스트들이 머무는 공간은 생활의 느낌이 물씬 남 아 있어 가정집에 놀러온 것 같았다. 권 씨가 대학 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했던 20대를 제외하고선, 태 어나고 지금까지 지낸 집이라고 했다. 세월이 듬뿍 묻어 있는 아늑한 거실에는 꼬마전구가 반짝거리 고, 한편에는 다녀간 게스트들이 다정하게 남겨둔 흔적이 가득하다. 복층의 다락 공간이 게스트들의 침실. 오늘의 게스트는 한 명이 더 있었지만, 이튿 날 아침 혁신도시의 기업에 면접을 보러 갈 예정이 라 정장을 곱게 걸어놓고 이미 잠자리에 든 후였다. 
술과 담소를 나누는 도란도란한 여행자의 밤은 아 쉽게도 다음을 기약한다. 대신 호스트, 권혁주 씨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불이 켜져 있던 1층 왼편이 바로 권 씨의 연구실이 자, 휴식 공간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 재료와 원산지가 적힌 술항아리가 층층이 익어가고 있다. 전면이 투명한 냉장고에는 온갖 술이 그득하다. 이 곳은 게스트하우스이기 이전에 우리 술을 연구하 는 곳이자, 술을 빚는 공장이라고 한다. 500L짜리 발효 탱크가 6개, 한 번 빚으면 4,000병의 술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권 씨는 술과 관련된 교육을 하고 있다. 지역의 고 등학교 등에서 역사나 예의 등에 대해 강의를 하는 데, 이미 버릇이 든 성인들보다, 앞으로 술을 마시 게 될 미성년에게 필요하고 효과가 좋은 것이 술 강 의다. 우리 술과 관련된 컨설팅도 한다. 전통주 상 품을 개발하고, 공장을 설립하고, 상표를 내는 전반 적인 일에 길잡이가 되어 주는 셈이다. 최근엔 태백 시 조탄동의 마을에 다녀왔는데, 조탄의 옛 이름인 도릉, 즉 ‘복숭아 언덕’에서 모티브를 딴 술을 곧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담에서 만들었다는 술은 예전에 SNS에서 본 적 이 있다. ‘주담가양주’. 술 이야기가 있는 집에서 빚 은 술이란 이름이 정감 어렸다. 이곳에 있는 술은 다 자유롭게 맛봐도 좋다고 하면서, 그중 권 씨가 먼저 꺼내어 준 술은 ‘모월’이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원주를 모월(母月)이라고 부른 데에서 따 온 이름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 이 땅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지금 이 공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월은 증류 식 소주인 ‘인’과 청주 ‘연’ 두 종류인데, ‘인연’ 역시 여행 잘 어울리는 네이밍이다. 술병에 적힌 글씨는 한글이다. 한문은 쓰지 않는다. 예전에 한시를 병에 적은 적이 있는데, 그 술을 선물 받은 외국인이 ‘중 국술이냐’고 물었던 후부터다. 모월은 새콤하고 맛 있었다. 치악산 맑은 물과 원주쌀 토토미로 만들었 단다. 역시 직접 담갔다는, 라벨이 없는 80도의 술 도 맛봤다. 입에선 달았지만 목으로 삼키자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다. 권 씨가 미처 다 마시지 못하 고 내려놓은 술잔을 테이블에 뿌리고는 불을 붙였 다. 파란 불이 일렁였다. 권 씨는 원래부터 술을 워낙 좋아해서, 맛을 보고 어 떤 브랜드의 술인지 알아맞힐 정도는 되었다고 한 다.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17년 전 만든 유리병 때 문이었다. 병을 선물하려다 보니 채울 것이 필요했 고, 술을 직접 만드는 데에 이르렀다. 술을 빚다 보 니 욕심이 자꾸 나고 부족한 것이 보였단다. 그 이 후로는 지금까지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한 여정이었 다. 다양한 술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우 리 지역의 술 빚는 사람부터, 이번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마셨다는 ‘풍정사계 春’ 등등. 1,300 년 가까이 된 독일의 바이엔슈테판 양조장, 870년이 넘은 일본의 스도우혼케(須藤本家) 양조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대화 곳곳에서 권 씨의 술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몇 년 전 크라우드 펀 딩으로 자금을 모으며 헤드카피로 내세운 문구는 ‘백년 뒤를 꿈꾸며’였단다. 백 년이 지난 후, 원주에 온 누군가가 원주 술을 마시자고 하며 그가 빚은 술 을 떠올리는 것. 권 씨가 꿈꾸는 미래다. 술과 이야기가 있는 밤은 안온하다. 짧은 대화를 마 쳤다. 권 씨는 이튿날부터 열리는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대축제’에 참석하러 서울로 갈 예정이란다. 처음 보는 술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마셔 봐 야 직성이 풀리다 보니, 이번에도 양껏 술을 담아올 것이라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 숙소로 올라가려 는데, 바깥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깊은 밤, 눈 내리 는 소리, 아무래도 술 한 잔 더 하기에 좋은 밤이건 만. 내일을 기약하며 아늑한 침대에서 곯아떨어졌 다. 방은 아주 따뜻했다. 이튿날 아침 부스스 일어난 게스트하우스엔 아무 도 없었다. 나갈 채비를 다 마치고 나니, 권 씨가 돌 아왔다. 게스트를 혁신도시까지 데려다 주고 왔단 다. 다정한 사람이 만드는 술은 좋은 술일 것이다. 언젠가 지나는 길에 또 한 번 술 한 잔, 혹은 차 한 잔을 기약하며, 짧은 여행을 마친다.

 
글 · 사진 이새보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