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획


1인 가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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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가구와 잘 아플 권리

강의 조한진희 다른몸들 활동가
정리 계간 무위당사람들 편집위원회


<이 글은 계간 무위당사람들 70호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새롭게 결혼을 하는 신혼부부도 있고 예비부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남녀가 결혼을 꿈꾸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비혼’ 여성도, ‘비혼’ 남성도 흔한 시대입니다. 1인가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북유럽의 국가들 중에는 1인 가구 비율이 50%에 육박하는 나라들도 많습니다. 1인 가구에게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해 무위당학교가 마련한 강좌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혼자 살다 아프면 어쩔래?
흔히 건강할 권리는 많이 아시죠? 저는 질병권, ‘잘 아플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잘 아플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이에요. ‘혼자 살다가 아프면 어쩔래?’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흔히 하죠. 신문에서는 ‘1인가구 고독사,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장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여러 미디어에서 1인가구가 질병에 취약하다는 통계를 주기적으로 내보냅니다. 1인 가구들은 잦은 외식으로 나트륨 섭취량이 많고 때문에 고혈압 발병률이 높다는 식이죠. 이런 보도들을 보시면 어떠세요? 걱정이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불만을 품어본 적은 없으신가요? 저는 굉장히 불만이었어요. 왜 저렇게 1인가구가 이 사회의 근원적인 취약계층인 것처럼 이야기할까. 
우리는 인간의 몸이 굉장히 독립적이라고 여기잖아요. 저는 우리의 몸은 독립된 신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대에 들어서 여성의 몸은 말라야 아름답다고 사회가 말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도전하게 됐고​ 실제로 현대 여성들의 신체 사이즈를 변화시켰죠. 마른 몸을 사회가 추앙함으로 인해서. 만약 사회에서 뚱뚱한 몸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많은 여성들의 몸은 뚱뚱할 거예요. 나의 의지대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정한 미의 기준이 굉장히 마른 몸이기 때문인 거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몸과 의지가 사회와 분리되어있지 않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질병이 개인화된 사회

제 친구 중에 근위축성 척수염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이용해 생활해요. 저희 둘이 같은 병원에 다니거든요. 저는 보통 하루에 아홉 알에서 열한 알 정도의 약을 먹고 살아요. 그 약을 먹어야 강의도 하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처방받는 종류가 열한 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보통 한 종류나 두 종류의 약을 처방받아요. 저희 둘 중에 누가 더 건강한 걸까요? 
약의 개수만으로 건강을 절대적으로 판단할 순 없죠. 특히 이 경우엔 더 그래요. 이 친구는 골다공증이 있어요. 골다공증을 예방하려면 햇빛 ​많이 보고 살짝 땀이 날 정도로 하루에 30분 이상, 일주일에 3회 이상 운동을 권장하는데 가능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골다공증이 있단 말이에요.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는 골다공증약을 먹기 위해서는 허리엑스레이가 필요하대요. 우리가 엑스레이를 찍을 때 기계 앞에서 특정자세를 취하게 하잖아요. 그런데 이 친구는 그 자세가 취해지지 않기 때문에 손목을 찍어서 골다공증 정도를 가늠합니다. 그렇지만 손목 엑스레이로는 급여약을 처방 받을 수 없어요. 기초생활수급권자인데도 비싼 약을 먹고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규정한 표준의 신체가 누구인가.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 어떤 신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는지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이 친구는 의학기계가 몸에 하나도 맞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검사가 거의 없어요. 수술을 많이 한 의사선생님들은 촉진을 해보면 가늠할 수가 있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암인 것 같으니 어떤 검사를 해서 수술합시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런 몸들은 엑스레이, CT, MRI 이런 게 안 되니까 촉진으로 짐작은 하지만 검사를 못하니까 확진이 안되죠. 그러니까 수술을 못하죠. 그래서 이런 중증장애인들 중에는 몸이 아파도 병원에 안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여러 가지 여건 상 만들어진 경제적 이유로 병원에 가지 않는 것도 있지만 막상 병원에 가도 진단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제가 10년 전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어지럽고 몸살 걸린 것처럼 시작해서 점점 더 아팠어요. 그래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돌아다녔어요. 저는 현장 평화운동을 하러 팔레스타인에 3개월동안 간 적이 있었어요. 여성들은 아시겠지만 건강상태를 살피는 리트머스 같은 게 있죠. 팔레스타인 3개월차부터 갑자기 생리를 하지 않았어요. 자고 일어나도 너무 피곤하고 계속 심한 몸살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현장활동이 너무 힘드니까 그런가보다 했어요. 한국에 돌아가면 괜찮겠지. 활동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데도 오히려 건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갔지만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잘 진단되지 않았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보냈죠. 몸이 아파서 동네병원에 가고, 2차 의료기관에 가고, 나중엔 서울대 병원에 가고 수백만 원을 들여 검사를 했는데도 원인을 못 찾았습니다. 주변에서도 얘길 하죠. ‘내가 아는 한의원이 되게 용하대. 한 번 가볼래?’, ‘내가 아는 어느 동네 내과 의사가 환자를 잘 본다는데 한 번 가볼래?’ 그런 식으로 전국을 전전하며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그렇게 찾아간 병원에서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누군가에게 ​소개를 받아서 갔기 때문에 저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신 게 있잖아요. ‘운동권들은 부정적이어서 많이 아파’와 같은 말을 들었어요. 또 어떤 한의사 선생님은 비혼주의라서 음양 조화가 깨져서 아픈 거라고 그러시기도 하고. 또 다른 분은 제가 채식주의잔데, 채식주의라서 아픈 거라고 하고. 저는 생태주의자이기도 해서 면생리대를 오래 써왔어요. 유난 떨어서 자주 아픈 거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진료실에서, 의사와 환자 관계로 만났는데 하시는 거예요. 의학적으로 결과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질병의 원인이 환자 자신이 되는 거죠. 질병을 개인이 잘못 살아온 탓으로 돌리는 방식입니다. ‘질병의 개인화’라는 표현을 책에서 만들어봤는데요. 질병의 원인을 개인에게 찾으려는 사회적인 현상을 포착한 표현입니다. 
한 공중파 방송국의 유명 예능프로그램에서 ‘암에 잘 걸리는 성격’을 주제로 방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고편이 나갔더니 그 회차가 대박이 났대요. 사람들이 다 생각을 했겠죠. ‘암에 잘 걸리는 성격이 있어? 혹시 나도 그런 성격이면 성격을 고쳐야지’, ‘성격 고치면 암 안 걸리는데 도움이 되려나?’ 여러 가지 기대심리 때문에 시청자들이 그 프로그램을 보셨겠죠. 그 프로그램에서 암에 잘 걸리는 성격으로 첫 번째로 꼽은 게 일중독에 걸린 사람이었어요. 퇴근 후에도 업무 걱정하고 일이 너무 많아서 휴가를 상상하기 어렵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안절부절 못하고 할 일을 리스트로 정해놓는 사람. 두 번째는 완벽주의자. 세 번째가 착한 사람 콤플렉스 있는 사람. 여기 많이 있으시죠? 암에 걸리는 성격이랍니다. (웃음) 제가 그 방송을 보고 굉장히 화가 났어요. 암 걸린 사람을 특정할 수 있잖아요. 
 



저 사람은 성격이 저래서 암에 걸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업무가 심해지면 ‘암 걸리겠다’는 말을 농담으로 할 수 있고. 실제로 저는 암환자였거든요. 저의 문제의식은 이래요. 우리 사회는 업무량이 너무 많아요. 개인에게 주어진 업무량이 굉장히 많고 업무적으로 실수 했을 때 그게 잘 용납이 되지 않아요. 조금만 실수해도 ‘똑바로 안 해? 승진할 수 있겠어?’ 늘 고용이 불안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일중독에 걸리는 게 이 사람의 성격 문제일까요? 일중독에 걸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굉장히 어려운 사회잖아요. 업무량도 많고 경쟁도 심하고 고용도 불안정하고. 승진은커녕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불안한 사회인데. 왜 우리 사회에서 저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구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성격을 고치면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네가 암에 걸린 건 네 성격 탓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냐는 거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가 있습니다. 누군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래, 걔 성​격이 예민하고 밥을 빨리 먹더니’ 이런 얘기 한 마디씩 하죠.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그 사람의 생활 습관을 지적합니다. 물론 술을 많이 마시거나 식습관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건강이 좋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짜게 먹고 술을 많이 마시는 거 아시죠? 스트레스에 많이 놓인 사람들일수록, 고용불안정이 높은 직종일수록 짜게 먹고 술을 많이 마시죠. 제가 홈리스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는 데요. 이 분들이 식습관이 굉장히 안 좋으세요. 굉장히 짜게 드시고 한 끼에 3~4개 공기를 드세요. 그러다가 어떤 분이 실제 위암에 걸리셨는데, ‘거 봐라. 짜게 먹고 많이 먹으니까 위암에 걸렸다’ 홈리스 동료 사이에서도 그런 말이 돌았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난하고 특히 배를 곯았던 기억이 있으셨던 분들은 내일 여기에 또 와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안 때문에 밥을 많이 먹게 되더라고요. 항상 배급소에서 식사를 하시기 때문에 식사시간이 정해져있고 이렇다보니 빨리 드시죠. 사회의 많은 요소들은 구조와 연동돼 있습니다. 생활습관조차도 사회의 결과물인 경우가 굉장히 많죠. 빈곤층일수록 비만률이 상당히 높아요. 제가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미의 기준 뿐만 아니라 생​활습관도 소득범위라든가 고용안정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개인의 생활습관만 딱 잘라서 이야기할 수 있냐는 거죠. 이런 게 저의 문제의식입니다. CT촬영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CT가 방사선에 피폭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영국 같은 경우는 1년 동안 찍을 수 있는 횟수, 내지는 방사선 피폭량을 정해놓거나 관리한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엔 건강검진에서 전신 PET-CT를 찍기도 하잖아요. 위험성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산업재해 이런 건 너무 잘 알고 계시죠? 한 해 2,000명 넘게 죽고 있습니다. 부서진 계급이동 사다리. 이런 것들 다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는 위험 요소라는 거죠. 미세먼지와 담배만 위험요소인 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소인데, 계속 개인의 성격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겁니다. 요즘 TV를 켜면 ‘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디에 좋다’ 이런 게 계속 나오죠. 방송을 계속 보고 있다 보면 ‘내가 저거 안 먹어서 아픈가?’, 노니 먹으면 건강해질 것 같고 블루베리 먹지 않아서 눈이 침침한가 싶잖아요. 그런 방송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방송을 계속 보다보면 뭔가 개인들이 저런 음식을 먹지 않아서, 저런 운동을 하지 않아서 아픈 것 같은 인식을 주죠. 한국은 저런 방송 비율이 아주 높은 사회 중 하나고. 저는 우리 사회에 건강을 둘러싼 환상이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 저는 이게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질병은 사회적 결과물

여러분 ‘펜로즈의 계단’ 아시나요? 계속 오르는 것 같지만 사실 어디에도 오를 수 없는 계단이죠. 저는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지만 빈익부 부익부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잖아요. 건강은 사회적인 여러 조건들의 결과물입니다. 물론 개인이 좀 더 노력하면 건강해질 순 있겠죠.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변호사 되고 의​사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게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점점 더 희귀해지는 거잖아요. 하루에 삼십분 땀나게 운동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하루에 열두 시간 혹은 그 이상 노동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도 퇴근 후에 헬스장 가서 운동하지 않고 온 것을 자책하죠. 저는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노력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 자체가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또 하나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다’ 이런 인식이 있잖아요.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 건강의 기준이 높을수록 누구에게 이익일까요? 회사를 생각해볼게요. 회사에서 지금 열 시간 노동하고 다음날 출근했어요. 그 다음날 또 출근해서 열 시간 노동하고 퇴근하고. 그 다음날 너무 힘들다 그랬더니, 부장님이 ‘야, 젊은 놈이 이정도 갖고 그래’ 하면서 ‘나 때는 열여섯 시간씩 노동하고 밤에 깡소주 먹고 집에 들어가고 잠만 잠깐 자고 나와서 또 일했는데 젊은 놈이 빠져서는. 건강이 부실해서 그래. 건강관리 안 해?’ 이러잖아요. 그래서 사실 열 시간 노동하고 겨우 집에 갔다 오고 이러면 아픈 게 정상인데, 아프다고 했더니 ‘너 건강관리 안 해?’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는 거죠. 기업은 건강의 기준을 자꾸 높여요. 「건강의 배신」이라는 책에 나왔던 내용인데요. 콜레스테롤, 혈압과 같은 수치의 기준을 보다 엄격하게 하면 누구에게 이익이죠? 제약회사입니다. 건강과 관련된 정상수치를 정하는 건 의사들이지만 그 의사들의 학회를 후원하고 물적기반을 제공하는 건 제약회사라는 걸 그 책에서는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건강의 기준이 점점 높아지는 게, 시민들에게 이익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의 기준이 높고 질병의 개인화가 강화될수록 정부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정부의 입장에서도 속된말로 남는 장사라고 생각해요. 질병이 개인화된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질병의 책임을 자기한테 찾아요. 이를테면 아침에 내가 요가 안한 것, 짜게 먹은 것. 이런 식으로 자꾸 찾죠. 대기오염이나 GMO 식품 수입처럼 건강과 직결된 중요한 사안을 정부에 문제제기 하기보다는 ‘아침에 헬스 어떻게 할까, 돈을 조금 더 벌어서 노니 사먹을까, 내가 자세가 바르지 않아서 거북목 온 거 같아’하고 생각하는 겁니다. 질병이 개인화 될수록 사회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개인의 생활습관을 교정하는 방식으로 시선이 내면화 되죠. 그래서 저는 정부에게도 이게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질병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라는 인식이 시민들에게 강화될수록 사람들이 정부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게 될 것 같거든요. 

혼자살아도 덜 불안한 사회

1인 가구 얘기를 드디어 시작하겠습니다. 1인가구가 한국사회에 출현한지는 굉장히 오래됐죠. 그런데 최근 1인가구 비율이 아주 급하게 늘었습니다.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부양의무제’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부양의무제 폐지를 놓고 청와대 앞에 ‘부기우기(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위한 우리들의 기지개)’ 농성장이 있습니다. 
부양의무제는 가족을 1차적인 복지단위로 보는 데서 나오는 거거든요. 특히 장애인 분들이나 홈리스 분들이 부양의무제 피해를 직접적으로 많이 봅니다. 중증장애인의 경우에는 가족이 있지만 돌보지 않고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기도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수급권자 신청을 하러 갔더니, 서류상에 동생도 있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어서 수급권자가 아니래요. 근데 중증장애인은 노동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굶어죽거나 죽지 않을 만큼만 생존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겁니다. 홈리스 분들도 그런 분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장애인 운동, 홈리스 운동하시는 분들이 농성장을 만든 건데요. 세계적으로 그래왔지만 특히 한국은 가족을 1차적 복지담당자로 보고 있어요. 가족 안에서 1차 복지가 되고 그 이후에 사회가 복지를 감당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죠. 그래서 1인가구가 많아지니까 가족이 복지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그걸 정부가 부담하게 되니까 혼비백산하게 되는 거죠. 지금처럼 여덟 시간 노동하고 퇴근하고 쉬는 생활이 일반화될 수 있었던 건 현대자본주의 자체가 여성의 무상 노동을 전제로 발달했기 때문이에요. 여성들이 무상으로 제공한 노동 위에서 집이 휴식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1인가구가 대거 출연하면서 이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집에 무상으로 노동을 제공하던 존재들인 엄마나 아내가 없어진 거죠. 그래서 1인가구가 대거 출현하게 되면서 사회가 굉장히 진동했습니다. 
누군가 무상으로 제공했던 것들을 사회가 해야 하니까 비용이 더 들겠죠. 지금은 1인 가구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좋아졌지만 불과 2~3년 전만 해도 1인 가구가 이 사회의 근간을 흔든다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저와 같은 비혼주의자들은 더 공격을 많이 받았죠. 1인가구의 출현에 우리 사회는 굉장히 당황했고 지금도 당황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1인가구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를 썼어요. 1인가구가 대세가 된 지금은 사회로 포섭하고 같이 살 수 있게 하려​는 쪽으로 인식이 변화했습니다. 그래서 지자체에서 앞 다퉈서 정책을 만들고 하는데요. 제가 앞서 계속 이야기했지만 1인가구라는 삶의 형태 자체가 소수자적 정체성이라거나 위험한 건 아니에요. 우리 사회가 어떤 제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서울시는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65세 이상의 분들, 혹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간호사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서비스가 있어요. 근데 저의 문제의식은 이런 서비스가 65세 이상 노인뿐만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들 혹은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제공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자체가 가진 자원으로 잘 할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에요. 입원할 정도는 아닌데, 집에서 혼자서 아프기에는 위험한 상황에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면 1인가구들이 혼자 살아도 덜 불안하겠죠. 제가 또 하나 제안하는 것은 단기요양공간입니다. 병원에 입원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보건소 안에 단기적으로 머물 수 있는 요양시설이 있는 거죠. 1인가구인 사람들이 그런 곳을 이용할 수 있겠죠. 거기서 밥도 제공받고 간단한 치료도 받고.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혼자 살아도 덜 불안할 수 있겠죠. 또 하나 제가 구상한 건, 돌봄두레입니다. 



두레에 가입한 1인가구들이 요청하면 또 다른 1인가구가 와서 돌봐주는 거예요. 어떤 의료적 기술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정서적 도움을 나누는 거죠. 혹은 물리적 시간을 나누는 거죠.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1인가구로 살아도 덜 불안하겠죠. 사실 모든 사람은 질병 앞에 취약하고 질병이 두려워요. 고독사는 1인가구에만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몸의 특질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사회가 어떤 제도와 문화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몸이 장애인으로 구현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1인가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1인가구라는 특성 자체가 취약한 게 아니에요. 이 사회가 다인가구 중심으로 세팅되어있기 때문인 거죠. 그래서 문제는 몸이 아니라 제도다. 다시 강조하는 거고요. 제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개인을 계속 도움을 받아야하는 취약한 존재로 만드는 거죠. 제도의 뒷받침이 있으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어요. 제도의 빈곤이 1인가구의 취약성을 만​드는 거지 1인가구 자체가 취약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1인가구에게 좋은 제도는 다인가구에게도 좋은 거예요. 지하철에 승강기 만드는 투쟁을 2000년도 초반에 중증장애인들이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장애인들뿐만 아니라 유아차를 탄 부모와 계단이 불편한 노인들도 편해졌어요. 버스에 다음 역을 문자로 알려주는 전광판도 청각장애인을 위해 생긴 거지만 건청인들도 방송을 놓쳤을 때 그걸 보면서 확인할 수 있게 됐죠. 소수자에게 좋은 건 대체로 다수자에게도 좋아요. 1인가구가 늘어남으로서 사회적 돌봄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본격화 되었고, 사회적 돌봄이 늘어날수록 다인가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훨씬 좋은 사회가 됩니다. 

우리는 잘 아플 수 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최종적인 이야기는 이겁니다. 우리는 잘 아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구든 다 아프잖아요. 덜 불안하게, 잘 아플 수 있는 사회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이 잘 구성되면 1인가구여도 불안하고 힘들지 않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일찍 비혼주의자로 정착하고 굉장히 오랫동안 1인가구로 살았습니다. ‘혼자 살다가 아프면 어쩔래’ 이런 이야기를 매일 들었어요. 그러다가 실제로 아프게 되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혼자 살았기 때문에 ‘질병권’을 생각해내고 ‘돌봄두레’도 생각하게 된 것 같거든요. 소수자적 위치에 있다는 건 그 삶이 힘들다는 증거긴 하지만 이 사회를 다른 결로 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되기도 해요. 장애인이기 때문에, 홈리스이기 때문에, 여성이라서, 퀴어라서 사회를 다르게 읽을 수 있죠. 저는 1인가구가 사회의 제도들을 다르게 읽고 사회가 어떤 곳으로 재편되고 변화되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라고 생각하거든요. 성별과 나이와 같은 자신의 자원에 따라서 필요한 제도가 다 다를 수 있거든요. 돌봄두레와 같이 꼭 거대한 자본이나 제도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1인가구라는 게 중앙 정부에서 보기엔 관리되지 않는, 가족제도를 전제로 한 복지제도를 뒤흔드는 파편화된 인간들이겠지만 사실 이 사회의 다양한 것들을 1인가구만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회의 개척자로서의 관점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생의 어느 시기에 임시적으로 1인가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나 높아졌잖아요. 그래서 자부심을 갖고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가 잘 아플 수 있기 위해서 어떤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어떤 가능성을 꿈꿀 수 있을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